베를린에서 이 글을 보냅니다. 베를린의 겨울은 한낮에도 저녁처럼 우중충합니다. 오죽했으면, 독일의 밴드 엘리먼트 오브 크라임Element of Crime이 '베를린이 어둡고 추워지면Wenn es dunkel und kalt wird in Berlin'이라는 제목으로 노래를 만들었을까 싶어요. 날씨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닙니다. 이번 글은 오히려 베를린의 우중충한 겨울 분위기를 조금 걷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월 15일부터 25일까지 베를린 국제 영화제 '베를리날레'가 열리며, 베를린의 2월은 다채롭게 빛났거든요.
<라 코시나La Cocina>. 황금곰상을 놓고 경쟁한 스무 편의 작품 중 한 편인 이 영화는 뉴욕 타임스퀘어의 한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이민자들의 외로움과 사랑, 혼란을 보여줍니다. 감독 알론소 루이즈팔라시오스Alonso Ruizpalacios는 원작인 1957년도의 영국 희곡 <키친The Kitchen>의 무대를 현대의 뉴욕으로 옮겨 레스토랑 '더 그릴'이라는 하나의 작은 세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다큐멘터리 시리즈 <셰프의 테이블>과 드라마 <더 베어>를 보신 분들은 고급 레스토랑의 아름다운 음식 뒤에는 언제나 터지기 직전의 용광로 같은 부엌이 존재한다는 걸 아시겠지요. 이 부엌은 매우 엄격한 경계와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합니다. <라 코시나>가 무게를 싣는 점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영화제의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 중 한 곳
Haus der Berliner Festspiele
베를린 영화제가 시작되면, 어떤 영화를 볼지 고르는 설렘만큼이나 어디서, 어떻게 영화를 관람할지, 또 다른 관객들은 어떻게 관람하는지, 그것을 보는 것도 영화제를 기대하게 만듭니다. 레드 카펫이 깔리는 곳은 베를린 시내의 중심, 포츠다머 플라츠Potsdamer Platz에 있는 베를리날레 팔라스트Berlinale Palast입니다. 단지 이곳이 궁금하여 어떤 영화의 표를 예매하고 저도 올해 다녀왔습니다. 마틴 스코세지, 크리스틴 스튜어트, 캐리 멀리건, 킬리언 머피가 며칠 전, 혹은 몇 시간 전에 지나간 자리를 똑같이 밟아 보는 것이 흔한 경험은 아니잖아요.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입구
베를린 영화제에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들의 연령대는 넓습니다. 저는 이번에 한 영화를 좋은 자리에서 관람하기 위해 상영 1시간 전에 먼저 입구에서 기다렸습니다. 30분 정도 지나자 알파벳 J를 옆으로 뉘어 놓은 꼴로 긴 줄이 만들어진 걸 보며, 나름 선두에 서 있다는 것이 뿌듯했습니다. 저의 바로 앞엔 배낭을 멘 할머니 두 분이 계셨어요. 한 분의 배낭에는 ‘Omas gegen Rechts - 우익에 반대하는 할머니들’이라고 적힌 액세서리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날 극장에 오지 않았더라면, 이 할머니들의 그치지 않는 호기심과 도전을 모르고 지나가는 하루가 됐을 것입니다.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극장 안에서 영화가 상영되기 전
앞서 소개한 영화 <라 코시나>는 베를리날레 기간 동안 총 여섯 번 상영되었고, 그중에 한 번은 영화제의 프로그램이기도 한 'Berlinale Goes Kiez - 베를리날레가 동네로 갑니다'로 베를린 붸딩Wedding의 오래된 극장 '시티 키노City Kino'에서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시티 키노는 1958년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건설된 이래 문화 센터와 극장, 영화관으로 사용됐습니다. 프랑스 군대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은 한때 이 장소에 출입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요, 이곳에서 주방의 엄격한 계급 구조를 다룬 영화가 상영되었다는 사실, 흥미로운 우연이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