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보다 먼저 코롱섬에 다녀온 파트너의 친구를 태국에서 만났다. 그는 우리가 ‘좋아할 것 같다’며 론리비치 방갈로를 추천했다. 아직 공항이 없는 섬(2023년 1월), 자동차는 갈 수 없는 외딴곳에 위치해 인적이 드문 론리비치. 에메랄드 빛 해변과 발광 플랑크톤을 만날 수 있는 곳. 꼼꼼히 숙소 예약 앱을 살피던 파트너가 별안간 깔깔거리며 소란스레 웃는다.
질문: 에어컨이 있나요?
답변: 안녕하세요, 미안하지만 여긴 에코 리조트입니다. 여기엔 자연의 에어컨, 바람이 있는데요. 단언컨대 아주 훌륭히 작동합니다. 고맙습니다.
론리비치는 관광용 보트가 다니는 부두에서 오토바이로 40분이 넘게 걸린다. 론리비치에 조금 더 가깝게 들어가기 위해 공급선에 올라탔다. 배에서 내리니 어느 새 해가 저물어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소녀가 내게 아기 강아지를 건넸다. 헝클어진 곱슬머리에 낡은 갈색 피셔맨 바지를 질끈 묶은 꾀죄죄한 모습의 론리비치 주인장 다니가 체크인을 해주었다. 프랑스 억양이 잔뜩 묻은 영어로 약간은 취한 듯 말하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 피곤함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귀 기울여 들었다. 이 사람이 ‘자연의 에어컨’ 답변을 단 사람인 듯했다.
에코 리조트의 포근한 라운지
다니를 따라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길을 걸어 도착한 나무 방갈로 안에는 침대 하나, 잠금장치가 있는 나무로 만든 개집만 한 상자 하나, 나무 조각으로 잠그는 헐렁한 창문이 한 면에 하나씩 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빗물과 지하수가 담긴 커다란 물탱크가 있는데 그 물을 바가지로 퍼서 씻거나 볼일을 보고 물을 내릴 때 쓴다. 구멍 뚫린 코코넛 세면대와 예쁘게 꾸며진 화장실은 침실보다 안락해 보인다. 바가지로 물을 퍼서 씻어보니 내가 샤워하는데 쓰는 물의 양이 눈에 보였다. 물론 내 집같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걱정했던 것만큼 불편하지도 않았다.
기본에 충실한 방갈로
다른 숙박시설에는 당연히 있지만 론리비치 방갈로에는 없는 것들이 있다. 500ml 플라스틱병에 담긴 물, 일회용 칫솔 등의 소모품, 뜨거운 물 샤워, 콘센트, 와이파이. 섬이라 물이 귀하고 전기는 태양광발전 패널로 만들기 때문에 아껴 써달라고 한다. 심지어 근처에 식당이나 구멍가게도 없다. 대신 자체 운영하는 라운지 겸 카페 겸 식당에서 밥도 먹고, 음료도 마시고, 식수도 사고, 전자기기 충전도 할 수 있다. 라운지 벽에 붙은 메뉴를 보고 이름이 적힌 주문서에 적는다. 전 주문 아래로 다음 주문을 적은 다음 벨을 울리면 주방에서 확인하고 음식을 가져다준다.
3박을 예약하며 ‘그래, 인적도 드물고 훼손도 적은 곳을 즐기려면 희생도 필요하겠지.’ 생각했다. 어차피 캄보디아에서 맛있는 걸 먹는 건 거의 포기상태였다. 식당이 있다면 밥과 채소는 있을 테니 오레오, 견과류, 콩튀김과 김가루를 챙겼다. 방갈로에 짐을 놓고 식당으로 돌아가 메뉴판을 봤다. 놀랍게도 무려 제대로 된 비건 메뉴가 있다. 그것도 여러 개가! 캄캄한 저녁, 군데군데 은은한 조명이 떨어지는 자리에서 프랑스 셰프의 예쁘고 신선한 음식을 받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기분 좋은 배부름을 만끽하며 여기에서 며칠 더 묵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식당에서 먹은 옐로 커리
그리고 채소 가득 샌드위치
열대식물들이 무심히 자라는 수풀 속 방갈로의 나무 벽 틈새로 햇빛이 든다. 걸어서 3분이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의 백사장에 도착한다. 곳곳에 널려있는 선베드를 야자수 그늘 아래로 옮겨 드러눕는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도 잔잔하고 투명한 바닷물은 허리춤을 넘지 않는다. 배고프면 식당에 가서 채소가 잔뜩 들어간 샌드위치나 두부를 추가한 옐로커리 혹은 채소볶음을 먹고, 목마르면 신선한 코코넛워터를 마시고 과육을 긁어먹는다. 식당 주위에는 3개월 된 아기 강아지 10명이 꼬물거리며 장난치고, 식당 안에는 2개월 된 아기 고양이 3명이 고고하게 돌아다닌다.
식당 앞 강아지 천국
론리비치를 떠난 지 약 반년, 태국의 콜란타 섬 전체가 정전된 밤이 있었다. 바닷가에서 놀고 있던 차라 모닥불 옆에 앉아 저 멀리 바다 한가운데 번개가 치는 걸 구경했다. 한 시간 정도면 전기가 돌아올 거라고 현지 사람들은 말했지만 두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라 그만 숙소로 향했다. 밤길이 어두워 휴대폰 불빛을 켜고 걸었다. 숙소의 작은 태양광 패널에 연결된 전등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간절히 씻고 싶었는데 전기 펌프를 사용하는 화장실 물도 덩달아 멈추었다. 당장 불빛이나 충전은 없어도 그만이었지만 여름밤 끈적한 몸을 씻을 수 없는 건 정말이지 곤혹이었다. 정전이 와도 모를 론리비치의 화장실이 새삼 그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