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기다려지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 기대가 담겨 있을 수 있다. 곧 떠날 휴가에 설레기도, 마냥 화창한 하늘을 제약 없이 만끽할 수 있는 서유럽의 건조한 날씨 덕분일 수도 있다. 다만, 나에게 여름은 언제나 페스티벌의 계절이었다.
음악 페스티벌은 숨구멍 같았다. 한국에 있을 때에도, 프랑스에 오고 난 뒤에도 살아있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시공간 하나를 꼽자면 페스티벌 인파 속 무더위를 가로지르는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 각자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즐기는 이들을 볼 때이다.
프랑스에는 수많은 음악 페스티벌이 존재하지만, 내가 1년간 살았던 소도시에서는 매해 메탈/ 하드록 페스티벌이 열렸다. 아쉽게도 스케줄과 취향을 핑계로 직접 가 볼 기회는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음악 페스티벌에 가기 위해 파리 행 기차를 끊는다. 프랑스에 온 지 2개월째 되던 일이었다.
프랑스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인 음악 페스티벌 Rock en Seine에 꼭 가봐야 한다는 의무감을 핑계로 내세우며, 유학생에게는 나름 큰돈을 들여 페스티벌 1일권을 구매했다. 같이 갈 동행이 없다는 것과 나의 부족한 언어 실력은 당연히 뒷전으로 미뤄뒀다. 그렇게 무작정 떠난 첫 파리 여행은 온전히 Rock en Seine을 위해서였다.
살면서 뮤지컬이나 콘서트를 혼자 간 적은 있어도 페스티벌을 혼자 간 적은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혼자 오지 않은 척, 심심하지 않은 척을 온몸으로 연기하며 장소에 도착했다. 역시나 페스티벌에 혼자 온 사람은 어지간해서 보이지 않았고 스스로의 존재감을 죽이며 타임 테이블을 확인했다.
이미 철저하게 세운 스케줄에 따라 스테이지를 옮겨 가려던 계획은 생각보다 강한 햇볕과 넓은 부지 면적 앞에서 서서히 불가능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프랑스의 여름밤은 늦게 시작되기 때문에 햇살이 내리쬐는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공연을 기다리기에 내 체력은 한정적이었다. 경사진 언덕,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영국에서 온 인디 싱어송라이터 Mathilda Homer의 노래에 몸을 맡겼다. 시원한 바람이 잔디와 나를 스쳐 지나가고, 잔디에 누워 여유롭게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과 서로에게 기댄 연인들, 기타와 적은 수의 세션 그리고 약간의 허스키하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채워진 무대는 비현실적으로 여유롭고 꿈결처럼 평화로웠다.
👇 girl in red 공연
Scène Cascade에서 Girl in Red의 무대를 보고는 간단한 저녁을 사서 같은 스테이지로 돌아왔다. Polo & Pan의 공연은 서있을 힘이 없어 북적이는 인파의 뒤편에서 핫도그를 먹으며 들었다. 날은 여전히 후덥지근했고, 서로 웃고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 혼자 이질적인 여름의 풍경이 된 기분이었다. 핫도그를 먹고 있는 와중 모르는 남자가 나에게 소리치듯 기쁨으로 격양된 톤으로 한마디를 건넸다. “식사 맛있게 해! Bon appetit!”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에 경직된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핫도그가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도망치듯 식사를 마쳤다.
무작정 페스티벌 표를 구매하게 된 이유, Jorja Smith와 Jungle의 공연 시간은 점점 다가왔다. Grande Scène (메인 스테이지)에서 Jorja Smith 지난 앨범의 인트로가 흘러나오고 하늘은 점점 낮보다는 밤을 향하는 듯했다. 스태프들의 분주한 움직임, 전광판 영상에 집중하는 수많은 눈들, 공연의 시작을 애타게 기다리다 마침내 모두가 열광하며 소리를 지르는 순간, 나는 더 이상 페스티벌에 혼자 온 아시안 여자애가 아닌 Jorja Smith의 팬 중 하나로, 그 풍경의 일부로써 존재할 수 있었다. 앞자리 커플과 Blue Lights에 복합적인 감동이 섞인 환호를 주고받고 함께 큰 목소리로 가사를 따라 부를 때, 하늘은 어느새 분홍색과 붉은색의 중간으로 바뀌었다.
👇 Jorja Smith 무대에 열광하는 관객들 🤩
Jungle의 공연을 보기 위해 Jorja Smith 공연 바로 직후 메인 스테이지에서 Scène Cascade로 이동해보니 이미 사람들로 잔디밭은 꽉 차 있었다. 겨우 뒤쪽 중앙 즈음 자리를 잡았지만 이전처럼 쾌적한 시야는 아니었다. 어둠이 드리워진 하늘과 대비되게 강렬한 색의 조명으로 한껏 꾸며진 무대는 마치 어딘가 있을 법한, 장르로 치자면 서부극과 현대극을 섞은 세련된 픽션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