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예술 석사 프로그램 첫날, 교수님은 화이트보드에 이렇게 적었다. “Be Useful.”
상업예술계를 몇십 년 동안 살아낸 인생 선배가 할 수 있는 가장 뼈저린 충고이자 제대로 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아티스트병에 걸려버린 학생들에게 내리는 엄중한 경고였다. 불치병인줄 알았던 나의 아티스트병은 어려운 과제들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금방 치유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Useful’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그것은 곧 외국 땅에서 어른의 삶을 시작하는 어린 이방인으로서 해결해야 할 인생의 과제가 되었다. 나의 쓸모 속에서 비로소 정체성을 발견하고 이방인의 고독을 거둬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투룸매거진에서 만난 원진과는 단둘이 작업하거나 1:1로 대화할 기회가 없었다. 그럼에도 서로 묘한 동질감과 친숙함을 느꼈던 것은 그녀와 나 둘 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정언을 가슴속에 타투처럼 새겨놓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자본주의의 고장 미국, 그것도 살인적인 렌트비와 물가, 그리고 천재적인 인재들과의 경쟁을 겪어내야 하는 대도시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었다. 자신의 쓸모를,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의 자격을 고민하거나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반복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금방 서로의 타투를 알아보았다.
원진은 어릴 적부터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림을 그리는 삶을 동경했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칭찬을 받았던 어린 원진은 ‘성공'의 동의어가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라고 믿었다. 오랫동안 매우 구체적인 성공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음에도 막상 그를 향해 직진하지 못했던 이유를 그녀는 알지 못한다. '고등학교 때 미국 유학을 시작하면서부터' 라고 짐작할 뿐이다. 픽사와 지리적으로 한층 가까워졌지만 마음은 멀어졌다.
이방인의 길은 생각보다 울퉁불퉁하고 삭막했다. 넘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속도를 맞춰 걷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그러나 ‘이방인 치고' 혹은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라는 조건절 없이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은 사치라고 믿게 되었던 것도 같다.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잘하고 싶은 마음도 함께 커졌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회피하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원진은 그림을 계속 그리는 대신 언저리에 머물렀다.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으로 택했다. 회사에서는 마케팅이나 소셜미디어 콘텐츠에 쓰이는 디자인물을 제작했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결과물들은 신속하고 훌륭했다. 원진은 좋은 디자이너였다. 좋은 디자이너였지만 열정적인 디자이너는 아니었다.
2021년 겨울, 투룸매거진에 ‘지원하기’ 버튼을 눌렀던 것은 어쩌면 ‘디자이너 원진’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순수하게 좋아할 줄 아는, 하루종일 이야기를 상상하고 흰 도화지에 그림을 채워내던 어린 날의 원진이었을지 모른다. 투룸매거진은 픽사처럼 애니메이션 필름을 만들어내는 곳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야기에 어울리는 그림을 만들어내는 곳이니까.
원진은 투룸매거진을 처음 접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잡지를 좋아하는 사람인가를 기억해 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보그Vogue나 데이즈드Dazed를 손에 꼭 쥐고 읽던 지난 시간들이 어쩐지 더 의미 있게 느껴졌다. 차유진 대표는 어떤 포지션을 채우기 위해서, 혹은 특정한 기술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냥 ‘원진’이라는 사람에 이끌려 손을 내밀었다. 원진과 투룸매거진의 시작은 그저 순수한 ‘좋음'에서 비롯되었다.
투룸매거진이라는 무대 위에서 원진은 좋아하는 것과 마주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것을 마주하게 된 원진은 빠르게 자신의 할 일을 찾아갔다. 투룸매거진의 주요 홍보 수단인 소셜미디어에서 출발했다. 경력을 십분 발휘해 기사 홍보 콘텐츠를 더욱 매력적으로 소개했다. “소셜미디어에 올라가는 이미지는 우리 콘텐츠의 얼굴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에디터분들이나 독자분들이 열심히 써주신 글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못해 묻혀버리는 건 참을 수 없어요.” 원진은 책임감 짙은 목소리로 내게 설명했다. 투룸매거진의 구독 및 결제가 이뤄지는 웹사이트 개편도 도맡았다. 사용자 경험 측면의 디자인을 보강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여름, 원진은 유진 편집장과 수림 디자이너와 함께 투룸매거진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리뉴얼했다. 예술과 취미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투룸매거진의 콘텐츠가 해외 커리어와 다양성을 아우르는 라이프스타일로 범주를 넓히면서 확장성이 좋은 디자인언어를 도입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다. 원진은 디자이너로서는 유일하게 매 기획회의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멤버기도 하다. 때로는 에디터들보다 더 많은 글쓰기 아이디어를 제시하면서 말이다. 원진은 어느새 투룸매거진에서 쓸모를 가장 많이 발휘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가독성을 높일 수 있을까? 우리가 보석 같은 콘텐츠를 많이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잘 소개할 수 있을까? 투룸매거진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과 이미지를 전달해야 할까? 투룸매거진이 독자들에게 소속감과 영감을 동시에 줄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 이런 고민들이 어렵지만 참 즐거워요. 좋아하는 것에 도전할 수 있는 환경과 기회가 주어졌다는 게 굉장히 큰 특권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원진에게 투룸은 내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잘하지 못하지만 잘 해내고 싶은 것을 다 쏟아붓고 싶게 하는 곳이었다. 그 깨달음은 용기를 주었다. 그래서 얼마 전 투룸매거진에서 새로운 출발을 했다. 유진과 함께 운영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유진이 콘텐츠 자체를 이끌어나가는 사람이라면, 원진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투룸매거진 콘텐츠의 룩앤필, 마케팅, 가독성 등 비주얼과 커뮤니케이션에 관련된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활약과 준비 중인 차후 프로젝트들의 규모를 고려한다면 전혀 놀랍지 않은 타이틀이다. 정작 본인은 낯간지럽다는 듯 매우 쑥스러워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여전히 쓸모 있는 사람들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이방인들이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고, 좋은 평판을 얻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왠지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조금 달라 보인다.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스스로의 쓸모를 ‘취업이 잘되는 곳', ‘이민자에게 호의적인 곳', 혹은 ‘나의 콤플렉스가 발목을 붙잡지 않을 곳'에서 찾으려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좋아하는 곳에서 찾아내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을 잘 해내고 싶어 불끈 쥔 주먹이 더 이상 우리의 숨통을 조이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의 열정을 알아보고 팬이 되어준다.
투룸매거진은 좋아하는 것을 잘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즐거운 마음으로 잘 만들어 낸 매거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