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F화 된 작은 모바일 화면에 담길 투룸매거진의 기사를 쓰고 있노라면 공간의 한계에 부딪혀 머리를 싸매는 일이 잦다. 그럴 땐 오른쪽 어깨에 혜원을 소환하고 묻는다. ‘혜원 에디터, 당신이라면 이 문단을 어떻게 다듬어낼까.’ 혜원의 글은 투룸매거진 편집팀의 동경의 대상이다. 정갈한 글솜씨는 투룸매거진에 매달 싣는 인터뷰 기사에서도 드러난다. 인터뷰어로서 건네는 질문들은 짧지만 깊고 진하다. 인터뷰이에 대한 조사를 단단히 하면서도 지식을 뽐내지 않는다. 상대를 앞서가지도 뒤쳐지지도 않고 보폭을 잘 맞추어 나란히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피곤함도 시간감각도 잊은 채 혜원과 베를린 공원을 하염없이 걸었다는 유진 편집장의 말이 생각났다.
한참 침을 튀기고 얼굴을 붉히며 혜원의 글을 칭송하고 나니 그녀가 나지막이 응답했다.
“그저 이치에 맞는 글을 쓰려고 노력할 뿐이에요. 문맥이 타당하고,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확실한 사실에 근거해야 하고, 글쓴이의 입장이 모호하면 안 되는 거죠.”
메시지만큼이나 간결하고 정확한 말투였다. 찜질방 같은 나의 화법에 얼음방처럼 답했다. 돌이켜보니 우리의 대화는 내내 그런 식이었다. 베를린에 사는 혜원에게 글쓰기를 주제로 한 ‘라운지톡’을 요청했을 때만 해도 나는 주황색 찜질복 차림에 수건으로 양머리를 만들고 맥반석 계란을 나눠먹는 느낌의 담소를 상상했던 것 같다. 서로의 가장 열렬한 방청객이 되어 물개박수를 치고 '맞아 맞아'하며 격렬히 고개를 끄덕일 거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상 우리의 만남은 찜질방 입장 전 탈의실에 더 가까웠다. 쭈뼛쭈뼛 허물을 벗어 속살을 내어 보이고 주렁주렁 달고 있는 삶의 짐들도 풀어놓고 보니,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이었다.
개성이 드러나지 않은 글
혜원 작가는 작년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냈다. 그래서 오래도록 만날 기회가 없었다. 이름과 글로만 알던 이가 줌 화면 속에 등장하니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을 현실로 만난 것만 같았다. 혜원은 상상하던 것보다 침착하고 소탈한 사람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단정한 글처럼 침묵을 백지 삼아 신중하고 느릿하게 말했다. 과장해서 웃지 않았고 예의상 이해하는 척 공감하는 척하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본인의 글과 닮아 있었다. 아니, 그녀의 글이 그녀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해야 더 옳은 표현일까. 혜원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놀랐던 것은 그래서였다. “자의식으로 가득 찬 글에 싫증이 나요. 제 생각이나 감정 같은 걸 독자들은 크게 궁금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글에서 저를 계속 빼게 돼요.”
작년 초 출간한 혜원의 첫 에세이집 『나의 독일어 나이』 원고를 두고 한 지인은 ‘개성이 드러나지 않은 글’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그 말이 혜원에 마음에 쏙 들었다. 한국에서 매거진 에디터로 일하면서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두루뭉술한 키워드 아래 주제를 가리지 않고 기사를 써냈고, 대학생 인턴 시절 남성 매거진에 매달 다섯 편씩 가상의 ‘독자 기고’를 쓰며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과 사고를 연구했던 그녀다. 한국에서 에디터로 일한 시간은 유연한 자세로, 그리고 생산적으로 글을 쓰는 훈련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혜원은 누구의 입맛도 거스르지 않을 정갈한 한식과 같은 글을 쓰는 숙련된 글요리사가 되어 있었다.
우린 너무 달라서
개성을 추구하는 글, 나만이 쓸 수 있는 글, 전문 콘텐츠를 지향하는 글들이 질서 없이 쌓아 올려진 나의 책상 위에서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 대신 갸우뚱했다. 혜원과 나는 정확히 서로의 대척점에 서 있었다. 대화의 시작에서부터 서로의 차이점에 매료된 우리는 답안지를 맞춰보듯 각자가 가진 글쓰기의 고집과 철학을 대조해 가기 시작했다.
정보를 주춧돌 삼아 글을 뚝심 있게 설계하는 너와
영감을 에너지 삼아 즉흥적으로 글과 춤을 추는 나
하루 안에 글을 ‘끝장’을 본 뒤 계속 문장을 다듬어가는 너와
글의 끝을 모르는 스릴을 품은 채로 매일 한 문단씩 써나가는 나
침묵이 불편할지언정 확실한 것만 꺼내놓는 너와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면서 확실한 것을 찾아가는 나
읽는이가 자신을 글쓴이의 시선에 투영해 볼 수 있는 둥근 글을 쓰는 너와
읽는이가 자신도 몰랐던 욕망을 발견할 수 있는 뾰족한 글을 쓰는 나
우리의 대화는 어느새 인생을 향한 관점의 차이로까지 확장되었다. 정답이 분명히 정해진 환경에서 혜원은 편안함을 느끼고 나는 숨 막혀한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저널리즘의 세계에 있던 혜원은 논리적이고 아웃풋이 확실한 UX개발로 전향을 준비 중이고, UX 리서처로 일해오던 나는 반대로 작가의 길을 꿈꾸고 있었다. 둘 다 고등학교 문과생 출신이지만 혜원은 이과로, 나는 예체능으로 전과를 시도했었다는 전적만 확인해 보아도 우리는 뇌구조부터 다른 사람들이었다.
글친구 해요
혜원: “그래도 우리, 공통점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주원: “그러게요. 뭐가 있을까요?”
혜원: “......(침묵 후) 언젠가는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요?”
주원: “하하. 그때까지 발견하게 될 차이점이 얼마나 더 많을지 기대가 되는데요.”
혜원: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과의 대화가 더 생산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주원: “상대와의 차이에서 나의 특징이 더 뚜렷하게 보이기 때문이겠죠? 서로의 바운더리를 확인하며 나의 모양을 잡아가는 거 아닐까요.”
어쩌면 그래서 굳이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완벽하게 다른 서로에게 만족하며 우리는 글친구가 되기로 약속했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름을 교환하고 북클럽을 계획했다.
2시간 남짓한 대화에서 우리가 찾은 유일한 공통점이란, 서로의 글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혜원의 인터뷰 기사처럼 투명하고 담백하게 글감을 살려내는 글을 써보고 싶다고 고백하니 혜원은 나의 <누구나 이방인> 시리즈처럼 작가의 목소리가 진하게 담긴 글을 시도해보고 있다고 답했다. 욕망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소유하리란 보장은 없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욕망할지언정 그 글은 ‘너라서, 너만이 쓸 수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