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살기 시작한 지 어느덧 2년 가까이가 되었지만, 일을 핑계로 집에만 붙어있는 탓에 주변인들로부터 베를린 로컬들만 간다는 맛집이 어디냐는 질문을 들으면 “그건 나도 참 궁금한걸?” 하고 답한다. 아마 이 도시에 여행을 온 관광객들보다 내가 베를린에 대해 더 모를 거다. 하지만 고맙게도 이 도시에는 이따금 나를 집 밖으로 꺼내주는 친구들이 있다. 그 친구들이 불러낸다면 귀찮더라도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복잡한 시내로 나가고 싶어진다.
베를린 친구들 중에서 가장 처음 실제로 만난 한국인 친구는 일러스트레이터 김미화다. 처음 만나던 날, 베를린에서 내가 유일하게 아는 곳이었던 Hackescher Markt 부근에서 보자고 한 건 나인데, 정작 앉아서 이야기할만한 카페를 찾는 일은 김미화 작가가 담당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의 나는 단지 김미화 작가와 일상적인 대화만 하기 위해 만난 건 아니었다. 이미 SNS를 통해 그가 근사하고 멋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투룸매거진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제안할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그의 섬세한 그림은 투룸매거진의 귀여운 예산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거의 비어 가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김미화 작가가 “작업료가 많지 않더라도 협업 과정이 즐겁고, 내가 좋아하는 콘텐츠에 그림이 실린다면 결국 그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음에도 그때의 나는 “그럼 같이 해봅시다!”라는 말을 주저하다 결국 내뱉지 못했다.
김미화 작가와 첫 협업을 했던 투룸매거진 21호 커버
그 후로 몇 달 뒤 날씨가 부쩍 따뜻해졌을 무렵 미화작가를 우리 집에 초대했다. 양 조절에 실패해 한참 부족했던 수제비를 깨끗하게 나눠 먹고는 미화작가가 사 온 케이크 두 조각으로 남은 배를 채웠다. 이날도 늘 그렇듯 우리는 서로의 일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만날 때마다 일 이야기만 하는 걸 보면 우리는 정말 일을 사랑하나 보다.) ‘오늘은 꼭 말해야지!’라고 다짐했음에도 “투룸매거진에 그림 그려주세요.”라는 말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만남이 마무리될 즈음이 돼서야 겨우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언제 투룸매거진 커버 한 번 그려주세요. 작업료는 큰 회사만큼은 못 드려도 재밌을 거예요.”였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좋죠. 언제든 연락 주세요.”라고 답했다.
김미화 작가와 투룸매거진의 협업은 작년 9월에 발행된 투룸매거진 21호 커버 작업으로 시작됐다. 매거진이 나가고 나서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커버 그린 사람 누구야? 그림 너무 좋다.”라는 연락을 해왔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그림에 힘입어서였을까, 투룸매거진 21호는 창간 이후 가장 많이 판매된 이슈로 기록됐다.
첫 번째 협업 이후로 우리는 정기적으로 안부를 전하고 만났다. 만날 때면 늘 그렇듯 서로의 일과 관련해 고민하는 것들을 털어놓는다. 초보 사업가의 불안을 미화작가는 짧지 않은 프리랜서 경험으로 능숙하게 다독인다. 불안이라는 감정에 그는 누구보다 잘 공감한다. 그도 혼자 그림과 독대하며 많은 불안을 삭혔다고 했다. 미화 작가가 창작자로서 가진 불안과 걱정에 대해 이야기하면 나는 “이렇게나 멋진 그림을 그리고 있는걸요?”라고 말하며 그의 걱정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한다. 그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내가 무심코 지은 표정을 잠시 떠올리고는 작은 후회를 한다. 참 신기하다. 어쩜 이렇게 근사한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작업에 누구보다 엄격한 걸까?
김미화 작가와의 두 번째 협업
2월 1일에 발행된 투룸매거진 26호 커버
가장 최근에 발행된 투룸매거진 26호에도 그의 그림이 커버에 올랐다. 조용히 그림과 맞서던 그가 툭 하니 메일로 전달한 그림은 볼 때마다 특유의 섬세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림 속 요소 하나하나에 그가 치열하게 고민했을 시간이 묻어있다. 그림을 받은 나는 그가 피식 웃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림 너무 믓찌네요…. 호오!”라는 다소 방정맞은 답을 보낸다.
앞으로도 나는 미화 작가와 만나면 철없는 얼굴로 일에 대한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을 것 같다. 팬심이라고 하기에는 내 마음에 경계가 없으니 나는 우리의 관계를 멋대로 ‘우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 혼자 너무 앞서간 건 아닌가 싶어 지난주 시내에서 그와 만나 “투룸 라운지 레터에 우리의 관계가 협업에서 우정으로 연결된 이야기를 실어보려고요.”라고 넌지시 말했더니, 미화작가가 기쁜 듯이 웃었다. 나와 우정을 나누는 일러스트레이터 김미화 작가가 앞으로 가슴 뛰고 설레는 기회들과 잔뜩 만나기를 기원한다.
일러스트레이터 김미화의
5문 5답
베를린에서의 투룸 생활
저의 투룸 생활은 요새 점점 확장되고 있어요. 일을 하고 생활하는 공간으로서의 베를린은 사실 더 이상 새롭지 않지만,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지금껏 해보지 않은 일들을 해보면서 이곳에서의 삶에 생동감을 더하고 있어요.
투룸매거진과의 협업 경험
무엇보다 제가 하고 싶은 작업을 자유롭게 풀어나갈 수 있도록 믿고 맡겨주시는 점이 인상 깊었어요. 여러 곳과 협업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운 경험 중 하나는 마이크로 매니징인데요, 이런 경우 결국 서로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투룸매거진과 협업할 때는 제가 그 달의 표지를 책임진다는, 그리고 어떤 경우든 진실되게 소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셔서 늘 즐겁고 애정 어린 마음으로 작업에 임하게 되었답니다.
투룸매거진 21호와 26호 커버작업 스토리
21호 커버는 제가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그림이에요. 그림의 주제는 ‘불면의 시간’이었습니다. 불면의 시간은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나 혼자 겪고 이겨내야 하는, 철저하게 나만의 시간이기도 해요. 잠들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면서 보낸 시간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에요. 이번 26호 커버는 조금 더 안정되어 보이지 않나요? 추운 겨울을 작고 따뜻한 방에서 견뎌내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이방인 여성을 그렸어요. 창밖에 눈은 녹아가고, 맛있는 차를 마시고, 그 시간들이 아름답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봄이 오는 희망찬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애독자의 눈으로 바라본 투룸매거진
투룸은 저에게 다가와준 매거진이에요. 많은 것들이 무거워서 뒤뚱거리는 저에게 산뜻하고 가볍게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준 매거진. “세상엔 너와 이렇게 비슷하지만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이 있단다, 네가 관심 가질 만한 주제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줄게. 잠시 쉬어가렴”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읽고 나면 늘 기분이 좋아져요.
일상에서 작업의 영감을 받는 곳
영감을 받는 곳들이 너무나 많아 도리어 작업준비기간이 엄청나게 길고 작업시간은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에요. 항상 애매모호하고 모순적인 것에 끌리는 편이라 어떻게 보여줄지를 늘 고민해요. 그런데 최근 유진 편집장이 굉장한 팁을 주었습니다. 바로 ‘어떻게’가 아닌 ‘왜’를 생각하는 건데요, 앞으로 내가 이것을 왜 보여주고 싶은지로 생각의 방향을 바꿔볼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