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저에게 베트남은 너무 웃기고 아름답고 맛있는 곳이지만, 귀 따가운 경적과 매연으로 가득한 첫날의 하노이는 질서라는 것이 존재하나 싶을 정도로 정신없는 곳이었습니다. 미리 예약한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택시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나타났고, 유심을 사러 갔더니 인터넷으로 확인한 가격의 몇 배를 부르고, 길을 건너려고 기다려도 아무도 멈춰주지 않았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밥이나 먹자.”
검색으로 숙소에서 멀지 않은 평점 높은 식당을 찾아갔더니, 초록색 글씨로 식당 이름이 적힌 간판을 단 작은 공간에 몇 개의 식탁과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있습니다. 우두커니 간판과 공간을 번갈아 보며 당황한 배고프고 지친 두 사람 옆에 어디선가 초록색 그랩(동남아 택시/배달 앱) 티셔츠를 입은 작은 아저씨가 나타나 식당을 찾느냐 물으며 간판이 붙은 건물과 옆 건물 사이의 어두운 통로를 가리킵니다.
뭔가 수상쩍었지만 일단 그의 말대로 통로를 따라 걸어갑니다. 옆 건물 안쪽 일 층에 가정집으로 보이는 공간에서 옷을 입은 작은 푸들이 매섭게 짖어댑니다. 조금만 들어가면 바로 나올 줄 알았던 통로는 생각보다 길고 어둑어둑합니다. 통로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한가운데에 수돗가 비슷한 것이 보이고 이 길이 맞는 건가,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때 왼쪽 끝에 있는 문에서 한 여성분이 나오자, 뒤에 있던 그랩 아저씨가 그 문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식당 캇제의 내부 모습
문 안쪽의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흰색 벽에 검은색 프레임의 사진과 그림 몇 점이 걸려있고 검은색 식탁과 의자 몇 세트가 놓인 식당이 나타납니다. 빈 식탁에 앉자 그랩 아저씨가 다가와 어디서 왔냐고 묻더니 구글 번역기로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보여주고는 코팅된 하얀 종이에 검은색 글씨로 적힌 단출한 메뉴를 건넵니다. 샐러드와 채소볶음을 주문하고 추가로 건네받은 몇 장의 A4용지에는 길에서 떠도는 아이였던 아저씨가 식당 주인이 되어 식당 일과 그랩 운전기사로 투잡을 뛰며 길거리 아이들을 돕는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사장님은 고추 조각이 담긴 작은 그릇과 반으로 잘린 레몬이 가득한 통을 가져와서는 작은 그릇에 직접 레몬즙을 짜서 소스를 만듭니다. 신선한 잎채소와 숙주, 허브 이파리가 수북이 담긴 커다란 볼에서 채소를 이것저것 집고, 파채는 조금만 집어서 레몬소스에 이렇게 찍어 먹으면 된다고 알려줍니다. 또 작은 밥그릇을 여러 개 가져다 식탁 위에 올리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과 초록 잎채소를 끓인 맑은 국을 큰 그릇에 가져와 덜어 먹으라고 알려줍니다.
주문한 음식과 주문하지 않은 음식이 담긴 여러 개의 그릇이 계속 나왔고, 식탁은 어느새 상다리가 휘청거리게 가득 찹니다. 마침 궁금했던 베트남의 흔한 반찬이라는 토마토 두부 역시 기본 반찬이었는데요, 한식당에서 처음으로 상차림을 받아본 외국인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땅콩이 가득 올라간 바나나 꽃 샐러드와 채소볶음까지 받으니 신선하고 푸짐한 상차림에 대한 감동과 동시에 음식을 더 많이 주문하지 않은 것에 안도감이 듭니다.
아름다운 상차림
그 많던 음식은 놀랍게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기분 좋은 배부름에 살짝 노곤해집니다. 그제야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주방과 계단 입구 쪽에 놓인 유튜브 영상이 재생 중인 노트북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쩐지 신경을 예민하게 만드는 도로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는데,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베트남 전통음악인지 베트남식 트로트인지 헷갈리는 음악이 공간을 장악해 버린 것 같았습니다. 구글맵을 열어 캇제를 ‘좋아하는 곳’에 살포시 저장합니다.
두 번째 방문엔 월남쌈을 주문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오늘도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먹는지 설명하는 중인 사장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말수가 적고 표정이 별로 없어 무심한 듯 보이지만, 정겨운 사장님과 반짝이는 눈으로 그에게 한껏 집중한 손님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작지 않은 월남쌈은 무려 여섯 개나 나옵니다. 이 글을 쓰며 캇제를 생각하니 갓 지은 밥과 상큼한 레몬소스에 찍은 채소의 아삭함이 떠오르며 입안에 군침이 돕니다. 다가오는 8월에 베트남 무비자 체류 기간이 14일에서 45일로 늘어난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하노이에 다시 가라는 뜻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