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sion 4: 최종보스를 찾아라.
저녁 8시. 예정대로라면 하와이에 착륙하고 있을 시간에 우리는 안내 데스크의 직원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4시간 만이었다. 왜 항공편의 모든 수하물을 자동적으로 풀지 못하냐는 질문에 직원은 고개를 으쓱한다. “몰라요. 분명한 건, 수하물 수취 요청을 넣어주시면 뒤편에 누군가가 직접 여러분의 짐을 찾아 줄 거라는 거죠.” 운전자 없는 자동차가 거리를 돌아다니고 로봇이 카푸치노를 만들어주는 실리콘밸리에서 벌겋게 충혈된 눈을 한 공항 직원이 서울 가서 김서방 찾듯 ‘보라색 빛깔 파란색 트래블 프로 25인치 소프트 커버 가방 두 짝"을 찾고 있을 생각을 하니 기가 찼다. 찾는 데 두세 시간은 걸린다 하니 일단 집으로 돌아간다.
‘여행이란 공항에 모여 낯선 이들과 함께 줄을 서는 것인가'라고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을 아기를 힘겹게 잠자리에 눕히고 샤워도 하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웠다. 지난 48시간 동안 퍼덕대며 쌌던 짐과, 아기와의 첫 비행을 위해 준비한 각종 장난감과, 이동하면서 몇 번이나 접었다 편 카시트와 유모차, 그리고 땀에 젖은 긴장감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에어비엔비 숙소가 생각났다. 그 숙소의 환불 불가 규정도. 우리는 반드시 가야만 했다. 하와이로.
L은 짐을 찾으러 새벽 5시에 공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우리의 짐은 없었다. 놀라야 하는지 당연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안내 데스크는 24시간 운영되고 있었다. 직원은 한 시간 전에 우리의 가방이 ‘태그' 되었다고만 했다. 즉, 공항에 머물고 있는 것이 확인만 되었을 뿐, 어디에 있는지 누가 그걸 열심히 찾고 있는지는 모른다는 말이다. 안내 데스크와 달리 수하물 창고 직원들은 24시간 근무하지 않는다. 자정 전에 그들은 퇴근을 했고 그전에 우리의 가방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짐을 하와이 숙소로 보내달라고 항공사에 요청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2-3일은 걸릴 수 있으니까 일단 필수품을 백팩에 더 챙겨 와.” L의 문자에 억장이 무너졌다.
새 항공편은 샌프란시스코 공항보다 40분 더 먼 산호세 공항에서 출발한다. 나는 유모차와 카시트와 조금 더 빵빵해진 백팩과 아기를 낑낑대며 택시에 채워 넣고 L을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픽업하기 위해 집을 다시 나섰다. 그동안 L은 안내 데스크를 네 군데나 돌아다녔다. 수하물 검색 요청을 넣고 또 넣었다. 수하물 운반 직원에게도 손을 부여잡고 사정했다. 그러다 눈에 띄는 직원 한 명을 발견했다. 아이패드를 들고 다니면서 수시로 여기저기 전화를 넣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L은 그를 쫓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한번 간곡히 요청했다.
L의 직감은 맞았다. 그의 전화 한 통은 데스크 뒤편 직원들의 수취 요청보다 강력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찾았어요!” 드르륵 커다란 짐가방을 끌며 환호성을 보내는 이들이 그의 주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매니저급으로 보였다. 다른 직원들이 알려주지 않은 현실적인 조언까지 주었다. 수하물 창고 검색 및 운반은 사실 6시에나 재개된다던지, 어제 들어온 수취 요청건만 1000건인데 이제 고작 400건만이 해결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화를 넣어 빨리 찾아보라고 할 테지만 금방 나올지는 모르겠네요.” 우리는 비행시간을 맞추기 위해 한 시간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 만에, 우리의 짐이 수하물 창고 입구에서 뱉어져 나왔다. L은 가방 두 짝을 끌고 공항을 서둘러 떠나며 그에게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은인이세요!!!!” 나는 가슴팍에 아기를 매고 있지 않았다면 이 ‘최종보스' 직원에게 큰절이라도 했을 거다. 일반 절차를 따르는 것보다 누군가의 전화 한 통화가 더 빠르게 먹히는 이 현실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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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행히도 이 글을 빅아일랜드에서 쓰고 있다. 석양 아래 마이타이를 한잔 하며 말이다. 알래스카 에어라인의 비행은 1분도 지연되지 않았고, 아기는 첫 비행에서 주변에 앉은 모든 승객과 친구가 되었으며, 낙오된 짐 하나 없이 숙소에 도착했다. L은 등에 모래를 잔뜩 묻힌 채로 독서 삼매경이다. 아기는 인생 첫 수영에 햇살보다 밝게 웃는다. 그 광경에 모든 피로와 개고생의 억울함이 싹 가신다. 그래. 오길 잘했어.